본문 바로가기

(건강) 허리디스크 극복기

허리디스크 회복 / 극복기_ 챕터#1. 프롤로그 발병 전



허리디스크.

산통 다음으로 괴롭다는 허리 통증.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필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리디스크로 투병(?) 중이며,

가장 심할 때는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발병하고 근 18개월이 지나고 있는데 현재 상당히 회복이 되어

그 투병기와 회복기를 공유하여 조금이라도 아프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사부작 사부작 시간 나는 대로 글을 올려보려고 한다.


병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가 독자 여러분들에게는 중요하겠지만,

허리디스크가 사실 생활 습관에서 많이 원인이 되어 오기 때문에,

그 내용을 참고해 주십사, 프롤로그 개념으로 살아오던 습관에 대해 먼저 적어보려고 한다.


위의 그림이 허리디스크를 잘 나타내 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허리디스크.

디스크가 빠져나와 신경을 건드려 생기는 통증이라 현대의학에서는 말하고 있다.

위의 그림과 같이 주로 증상은 좌골 신경통이나 기타 신경통과 같이,

디스크가 나오면 디스크가 찌르는 부분이 아픈게 아니라,

눌린 신경이 관장하고 있는 부분에 통증이 내려온다.


이빨이 아파 신경치료를 받아 보신 분들은 잘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비교 대상이 맞는지는 논외로 하고)

그런 야시꾸리한 재수없는 아픔이 엉치나 다리근육, 발바닥 까지 후벼파게 된다.

그렇다면 디스크가 조금 각도를 틀어 찌르면 다른 쪽에도 통증이 갈거라는 생각이 들겠다.


그런데, 디스크가 나오는 원인은 무엇일까?

왜 튀어나오는 걸까?

정말 원인이 불명한가?





그렇지 않다. 그 부분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들은 관심을 기울이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1. 프롤로그. 나의 생활 습관.


필자는 생활이 참 진지했었다

학교를 다닐 때도 멍청하게 교과서를 다 싸메고 다녔던거 같고,

밖에서 체육활동을 한다고 하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를 다닐 때, 책가방을 메싸고 다니다 보니 

걷는 무게 중심이 앞꿈치 쪽으로 쏠렸던거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밖에서 항상 놀다가 들어가는 날이 일쑤였고

축구 농구 야구 가리지 않고 다 즐겨 했었던거 같다.





가끔 축구를 하다 보면 발목도 다치고, 

무릎 뒤로 찌릿 찌릿 하며 통증이 있기도 했었던 거 같다.

고관절이 빠지게 되면 무릎 뒤쪽에 통증이 찌릿하고 생긴다고 한다.

고관절은 사람이 걷는데 필수인 관절이기 때문에, 

고관절 자체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은 적고,

엉치에서 무릎뒤로 지나는 신경이 자극을 받기 때문에 통증이 무릎 뒤로 생긴다고 한다.

엎드려서 누워 있으면 발등이 땅에 닿지 않는데, 아마 어릴 때 까불다 접질린 발목이 

그대로 굳어버린게 아닌가 싶다. 

반 평발이 되었다.



(사진은 피겨 훈련 사진이라는데, 태권도도 벽에 다리를 벌리고 뒤에서 밀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태권도도 했었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3년 정도 했었고, 벨트도 무지개 색을 거쳐서 검정색으로 정착했었다.

가랭이도 찢고 발차기도 열심히 하고 특공무술도 배워보고 하다 보니

낙법이니 벽을 타고 미트가 터지라 발차기를 했으니

아마 온전한 하반신 근골격 상태는 아닐테다.





오락을 참 많이 했었던거 같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비디오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다 아는 마리오 시리즈 부터 드래곤볼 시리즈며 캡틴쯔사바 시리즈며

체질이 하나 빠지면 계속 파는 스타일이다보니,

한 번 앉아 조이스틱을 잡으면 몇 시간 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자연스럽게 등이 굽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땐 비염이 생겼고,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아토피가 생겼다.





필자는 20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힘든 형편이다 보니 2008년 귀국할 때 까지 학비며 생활비며 열심히 벌었다.

나중에 짬 좀 차고, 일본인인양 흉내낼 수 있을 때 즈음에야 막노동에서 벗어났지

그 전에는 식료품부터 이삿짐까지 안해본게 없었다.

제일 열심히 스케쥴 돌릴 때는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4시간 안됐었으니

아마도 몸이 거덜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몸은 푹 쉬어주어야 다시 돌아오고 회복하는 법인데,

그 때는 이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다.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면서 책장 좀 넘긴다고 했었을 때

자주 왼발을 오른쪽으로 꼬고 앉았었던거 같다.

그 덕에 한창 아플 때도 통증은 왼발로만 갔었다.

아마도 어릴 때 틀어진 고관절이 더욱 틀어져 골반까지 영향이 미친게 아닐까.





군생활은 해군 학사장교로 마쳤다.

그 때는 추노며 몸짱이며 해서 필자도 몸 만들기에 치중했던 시기였다.

진해의 기숙사에서 24부두까지 한시간을 뛰어서 출퇴근 하기도 했고,

말년 6개월은 고구마만 먹으면서 하루에 3시간 정도 운동 했던거 같다.

5키로를 먼저 달리고 2시간을 근육 운동했다.

점핑 친업도 하루에 100개씩 했다.

요즘 진짜사나이에서 말하는 특급 전사 체력을 가지고 있었고,

체지방도 9프로 까지 낮추면서 옷 좀 벗고 다녀도 될 몸을 만들기는 했었다.





그 때 역시도 몸을 쉬게 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던거 같다.

뼈가 바르게 잡혀 있는 몸에다가 근육을 붙여야 하는데,

뼈대는 건강하지 못한데 근육만 붙였으니, 근육이 빠지고 나니 자연스레 몸이 무너졌다.

운동도 막하는게 아닌거라는 걸 잘 알게 되었다.

당시 난 아플일이라곤 절대로 없을 줄 알았다.





사회생활은 광고분야였다.

9시에 출근해서 7시에 퇴근한 적은 20개월 동안 단 세번이었다.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365일 중 300일은 일했던거 같다.

돈은 많이 받았지만, 피로는 누적되었다.

광고 일의 태반은 기획서다.

기획서가 나오면 운영 매뉴얼이 나온다.

현장에 나가지 않으면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픈적 없었던 어깨와 목이 결리기 시작하고,

몸이 항상 무거웠다.

그래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이박삼일 정도의 달콤한 휴일이 있었고,

몸이 무거워지는 걸 막기 위해,

군대에서 했던거와 같이 양재천 거리를 10키로 정도 뛰어 다녔다.





참, 원거리 연애도 했었구나.

그녀는 울산에 살았다.

나는 서울에서 일했다.

우리는 나이차가 많았고, 그녀는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다.

나도 보답하고 싶었고,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금요일 야근하고 퇴근하면 일요일날 출근해야 하는데도,

밤차를 타고 울산을 내려갔다.

그녀도 노력했지만 집안이 엄해서, 대부분은 내가 울산을 내려갔던거 같다.

때로는 케이티엑스, 때로는 야간버스를 타고 

주말에 쉬는 주라도 생기면 울산으로 달려가곤 했다.

지금은 그녀가 없지만, 그렇게 2년을 보냈던거 같다.

집에서 발 뻗고 편하게 자는 날보다는,

버스 우등석에서 누워서 자는 날과, 일하면서 쪽잠을 자는 날이 많았다.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이유도, 

발병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하게 쓰고 싶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기 전에는 무리 하지 말라고 반드시 신호를 주게 된다.

암도 염증에서 궤양으로 가는 전조 증상을 거치게 된다.

의사는 아니지만, 암이라고 보는 내용의 일부는 

단순한 근육이 굳은 덩어리인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먹고는 살아야하니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으리라.

지금은 회복 중이고, 또 앞으로 다 나을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에,

나중에 치료를 받을 때에도 감염 증상인지, 

그 이외의 것인지에 따라 취사선택을 할 생각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2013년 7월, 기나긴 프로젝트를 마치고 드디어 달콤한 3박 4일의 휴가를 얻게 된 나는,

가족 여행을 앞두고, 양재천 거리는 여느 때처럼 10키로 정도 뛰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기억으로는 다른 날과는 달리, 

왼쪽 무릎 뒤가 찌릿하고 아파서 잠깐 쉬다가 다시 달렸는데,

그 통증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때보다 오래 느꼈던거 같다.







다음 날 부터 허리에 통증을 느꼈고 처음 이틀은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 통증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전조 증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 챕터로 이어집니다.